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땅. 대재앙이 지나간 이후의 지구는 대부분의 생명체가 멸종하고 인류의 문명도 무너져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고, 심지어 인육을 먹기도 한다. 인류가 이룩한 역사와 과학이 모두 초기화되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쌓여온 윤리와 도덕마저 사라진 이곳에서 한 남자와 그의 아들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이동한다. 카트에 통조림과 담요, 약간의 무기를 담아 매일 그것을 밀며 나아간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그들 스스로도 모른다. 그들은 막연히 남쪽의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희망이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기약 없는 여정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남자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네 안에 불이 있다고.

두 사람은 여정을 거듭하는 동안 수많은 위험과 난관을 넘게 된다. 그들의 물건을 탐해 그들을 죽이려는 사람들,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육신을 식량으로 삼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소수의 착한 사람들까지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며 때로는 그들과 싸우고, 때로는 숨거나 도망치고, 때로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먹을 것이 떨어져가는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운 좋게 통조림을 구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기를 얻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긴 여정을 이어가는 동안 남자의 몸은 점차 쇠약해져간다. 기침과 가래가 늘어나고, 나중에는 가래에서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남자는 목적을 알 수 없는 여정의 끝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져 간다.

2006년 발표된 코맥 매카시의 장편소설 ‘로드(THE ROAD)’의 줄거리다. 윌리엄 포크너,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비견되며 21세기 최고의 거장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우리에게는 코엔 형제의 영화로 유명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로 친숙하다. 1933년에 태어는 이 노작가는 노년에 이른 나이에도 전 세계 출판계를 뒤흔드는 명작을 연이어 발표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를 받으며 2006년과 2007년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2007년에는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작품성과 완성도 면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만 출간 당시 180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대중성도 갖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사실 이 작품이 얼마나 대중적인지는 외적인 부분으로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이 작품의 배경은 대재앙이 휩쓸고 간 지구 어디쯤이다. 시간도, 공간도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이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 지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평범한 남자가 아들과 함께 절망의 땅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만을 그리고 있다. 화려한 액션이나 영웅적인 스토리도, 드라마틱한 사연도, 빠른 전개나 반전도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서사물의 대중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그것은 코맥 맥카시라는 거장 작가에 대한 신뢰와 유래 없는 평단의 찬사가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가 그만큼 큰 힘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극단의 절망에서 희망을 말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계는 머릿속에 회색빛 말고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무겁고, 칙칙하며, 어둡다.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하게 느껴지고, 읽고 있는 와중에 수시로 숨이 막혀온다. 모든 것이 붕괴되고 오로지 절망만이 남은 세계를 이토록 실감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에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그 와중에 주인공들의 여정조차 목적이 없다. 한없이 답답하고 막막한 세계다.

이들의 여정에 분명한 목적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사실 이들의 목적은 생존 그 자체다. 살아남기 위해 계속 위험을 피해야하며, 먹을 것이라고는 사실상 통조림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시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극단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압도적인 힘도, 무기도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일 뿐인 그들은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쪽의 바다’라는 막연한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그런 삶 속에서 지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메시지적인 측면에서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희망에 대한 작은 기대일 수도 있다.

아이는 대재앙이 있기 전 문명사회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런 아들을 위해 남자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준다. 마치 우리의 일상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다. 또한 남자는 아이의 안에 불이 있고, 그들은 불을 옮기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는 당연히 그 불의 존재와 의미를 느낄 수 없다. 그 막연한 의미를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자신을 희생하며 아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다. 남자가 말한 불이란, 이 묵시록적 세계에서도 절대 꺼질 수 없는 구원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아이의 내면에 있기에 절대 암흑의 세계 속에서도 그 불은 무사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그들이 살아남아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남자도 먼저 죽은 이들을 부러워하며, 차라리 자신도 아이도 이 끔찍한 세계에서 살아남기보다 죽는 쪽을 택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 신에게조차 버려진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의 빛을 찾는 이 경건한 여정은 그래서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대재앙이 지나간 최악의 상황은 오히려 객관적 실체가 없는 아이 내면의 불, 즉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너무도 추상적이거나 구태의연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를 이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여 독자가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에 남은 아이는 또 다른 남자의 일행과 만나게 된다. 적어도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에만 한정하자면 아이는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아버지의 곁을 떠나야 하는 소년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에게서 독자들은 어렴풋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희망을 느낀다.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굴곡을 견디며 아버지에서 아들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본능이자 본질인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