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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밭을 갈던 성동구 압구정동 옛이야기
한남기 작가의 사진이 있는 이야기
 
한남기 사진작가   기사입력  2018/02/06 [09:41]

▲ 사진1. 1960년대 압구정동 모습     © 상조매거진


나는 남들보다 일찌감치 1973년에 지금의 압구정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 당시 서울은 강북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서울에서 한강 남쪽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영등포 일대가 전부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택지 개발이 시급해 졌다. 그래서 영등포 동쪽의 땅인 영동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강남개발의 시초였다. 그 당시 강남 이라는 말은 없었고 지금의 강남 일대를 영동 이라고 불렀다. 내가 살던 곳은 배 밭과 논두렁 밭두렁 사이에 서울시에서 택지로 개발한 곳으로 대지 100평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었다. 그 때 강남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성동구 압구정동 이었다.


1973년 겨울에는 시골마을 압구정동에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눈이 무릎 까지 푹푹 빠졌다. 당시 현대 아파트와 한양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에는 한강 둑방 높이에 맞춰 연탄재가 가득한 쓰레기를 메우고 있었는데 쓰레기 틈에 먹을 것이라도 있었는지 추운 겨울이면 커다란 독수리들이 무리지어 앉아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논에는 물을 대어 스케이트장이 만들어 졌고 어느 날 새벽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탈영병이 나타났다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한남대교의 옛 명칭인 제3한강교를 건너면 허허벌판 시골 동네 영동이 시작 되는데 1970년대 초를 기점으로 그 곳에 현대식 주택과 아파트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 하였다. 나 역시 남산아래 후암동에서 태어나 연탄을 때던 집에서 살다 기름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집으로 이사를 왔으니 그때부터는 겨울이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수도를 틀면 더운물이 펑펑 나오고 겨울에도 집안에서는 반팔을 입는 다는 것이 그때는 정말 호사였다. 집에 전화를 걸려면 서울에서 유일하게 교환수를 통해 몇 번을 연결해 달라고 하여야만 전화가 연결 되었지만 그 작은 불편함조차도 신기하기만 했던 동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강남구 압구정동 이다.


저녁녘이면 대문을 열고 나와 너른 벌판에 서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제3한강교에 아버지를 태운 차가 건너오는지 바라다보곤 했다. 우리 집이 있던 자리가 바로 요즘 로데오 거리 한복판이니 지금 생각해 보면 논과 밭 사이 그 허허벌판이 참 그립다. 내가 살던 동네는 평지였던 반면에 청담동쪽은 언덕 둔치였는데 그 곳은 배 밭으로 배나무가 즐비했고 5월이면 향기 없는 배나무 꽃들이 하얗게 장관을 이뤘다.


▲ 사진2. 소가 밭을 갈고 있는 현대아파트 일대     © 상조매거진

지금도 오롯이 기억하는 청담동 어느 언덕에는 오래된 묘지들이 모여 있었는데 택지 개발로 그 무덤들이 무참히 파헤쳐 지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았었다. 묘지가 있던 아래쪽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고 그 저수지도 메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뜻밖의 횡재를 했는데 민물 거북인 남생이 한 마리를 잡았다. 그 거북이는 커다란 어항 속에서 1년이 넘게 살았으며 그 거북이에게 먹이를 주기위해 그 때는 물도 맑고 한적했던 송추 유원지 인근 개울을 찾아 작은 물고기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꽤나 정들었던 이 녀석은 결국 어느 봄 날 한강에 방생해 주었다.


잠시 청담동 이야기를 하자면 청담동의 동명의 유래는 맑은 연못에서 비롯되었는데 나는 그 작은 연못을 직접 보았다. 그 당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많이도 쏘다녔다. 청담 이라는 그 작은 연못은 청담동 명품거리 언덕 넘어 한강 쪽에 있었는데 내가 봤을 때는 청담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맑은 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우리 집에서 자전거로 가장 멀리 찾아간 곳이 봉은사였다.


그 곳에 가기 위해서는 작은 산도 넘고 개울도 건너고 고불고불 시골길을 한참이나 가야 되는데 천년고찰 봉은사는 정말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격세지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게 바로 45년전 인데 강남은 어디서도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이렇게 빨리 변하고 발전하여 땅값 또한 천정부지로 급상승한 곳은 강남이 유일무일 할 것이다.

 

현재 한강에는 31개의 다리가 있으며 2020년 월드컵대교가 완공되면 총32개의 교량이 한강을 가로 지르게 된다. 그렇다면 제3한강교인 한남대교는 한강의 다리 중 몇 번째로 건설된 교량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3번째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제3한강교는 5번째로 한강에 건설된 교량으로 196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개통 되었다. 그 이전에 먼저 한강에 건설된 다리를 연도순으로 나열해 보면 한강철교, 한강대교(제1한강교), 광진교, 양화대교(제2한강교)이다.


준공년도 순으로 한강교량에 이름을 붙이면 한남대교는 제4한강교 이어야 한다. 이런 모순을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한강종합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한강 교량의 이름을 지금처럼 바꾸게 되었다. 1970년대 초에는 제3한강교를 건너면 드넓은 벌판에 말죽거리로 직진하는 길과 압구정동과 논현동으로 좌회전 하는 가는 길이 있었고 그 길 우측에는 1971년 12월말 완공한 현대식 주거시설인 공무원 아파트가 있었다.


그때는 신시가지 영동으로 이주 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공무원들을 이주 시키려는 명목으로 공무원 아파트를 신축 하였으며 강북의 명문 고등학교들을 영동으로 이전하여 강북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영동으로 몰리도록 하는 정책을 세웠다. 영동에서 가장 늦게 개발된 곳 중 하나가 바로 말죽거리 인데 말죽거리는 지금의 양재역 일대였다. 말죽거리는 본디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말들에게 강 건너 한양으로 입성하기 전에 말죽을 먹이고 단장하는 곳 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었다.

  

▲ 사진3. 제3한강교 개통으로 마지막 운행중인 나룻배     © 상조매거진


내가 살던 집과 제3한강교 사이 벌판에는 아파트 지반공사로 늘 분주했고 배나무가 많았던 한 둔덕 위에 커다란 슬라브 2층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집이었다. 소가 밭을 갈던 압구정동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 발전의 속도는 정말 대단했다. 현재 학동 사거리와 압구정동 로데오역 사이에는 중앙선 역할을 하는 개천이 있었고 그 양쪽으로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좁다란 아스팔트길이 있었는데 그 도로가 압구정동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도로였다.


도로 양쪽에는 배 밭과 논두렁 밭두렁이 있고 그저 여는 시골 동네에 현대식 주택들이 드문드문 있던 곳 이었다. 바로 그 곳이 내가 197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살던 곳이며 내 젊은 날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향과 같은 곳 이지만 그리워 찾아가고픈 옛 것들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냥 시나브로 생각나는 옛 일들만 조용히 존재하는 곳일 뿐 이다. 난 좋았던 그 시절 강남이 아닌 달보드레했던 성동구 압구정동의 옛이야기를 오늘도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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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2/06 [09:41]  최종편집: ⓒ sangjo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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