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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황제의 묘 ‘진시황릉’
무한한 권력과 폭정이 낳은 피의 무덤
 
상조매거진   기사입력  2011/02/15 [15:14]
우리나라의 왕릉, 이집트의 피라미드, 유럽의 영묘, 세계 여러 나라들 자랑하는 고분은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들 무덤 가운데 한 가지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덤의 규모에 집착하던 선대인들의 고집이 아닐까. 무덤의 크기가 곧 자신의 긍지였던 과거. 그 역사 속 가장 악명 높은 고분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라는 단어를 칭한 진 시황제의 무덤일 것이다.



진시황릉의 파수꾼, 병마용

1974년 중국 서안, 농부들이 우물을 파던 중 실제 사람의 크기와 동일한 병사의 머리를 발견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뻔한 동상 발견 일화는 관청직원에 의해 국가에 보고되었고, 그로부터 1년 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이것이 중국 문화재 역사 상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꼽히는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발견이다. 

병마용갱은 황릉에서 1km 떨어진 지역의 지하에 위치하는 진시황릉 갱도 유적으로서 방대한 규모와 섬세한 제작기법으로 8대불가사의중 하나로 꼽힌다. 유적지는 테라코타라 불리는 형태의 장례의식용 병사와 말 등의 모형이 있으며 현재까지 총 7개의 갱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병마용은 실제 사람과 비슷한 184cm에서 197cm의 크기로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제작된 병마용의 표정과 생김새가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하였고,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구현하기 위해 8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의 틀이 있어 이들을 조립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했다. 이러한 조합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병마용은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또한, 발견된 7개의 갱도는 크기가 약 30000제곱미터에 달하며 1개 사단에 준하는 8000여 개 이상의 병사 모형이 있다.
 
이와 같은 섬세한 제작기법과 갱도의 방대한 크기로 미루어보아 통일 중국을 다스렸던 진시황제의 자긍심과 권력을 대변해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황제 생전 왕권의 과시와 명예를 위해 수 많은 장인들과 민간인이 투입됐음을 말해준다.



진시황릉 끝나지 않는 미스테리

진시황제의 무덤은 중국 산시 성 시안에서 30km 떨어진 여산에 있는 무덤으로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46년부터 총 공사기간만 39년이 걸렸고 투입된 노동자 수가 70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황릉은 좌우의 폭이 485m, 상하의 길이가 515m이며 그 높이가 73m에 달한다. 이는 알아보기 쉬운 능묘의 형태를 가지기 보다는 산속의 산으로 표현되는 것이 어울리는 크기이다. 그러나 현재 황릉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소는 중국 정부의 상상에 의해 리모델링된 모조 황릉으로 황제의 관이 안치된 진짜 무덤은 여산 전체의 발굴이 끝난 후에야 실체를 드러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시황릉이 8대불가사의중 하나로 불리는 이유는 밝혀진 사실보다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황릉에 대한 비밀은 현재까지도 그 완연한 실체를 드러낸 적 없는 진시황제의 실제 시신과 병마용의 끝나지 않는 발굴, 진시황릉과 함께 지어졌다는 지하궁전의 실재 여부를 들 수 있다.
현재 여산에 지어진 지하궁전은 중국 정부의 상상에 의한 고증으로 사실상 박물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과거 지하궁전의 모습을 미니어처로 제작하여 비치했고, 그 밖에 문헌에 의거한 병마용 제작방법을 담은 장인의 모형과 진시황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을 옮기는 모습을 담은 노동자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사마천의 사기에 저술된 지하궁전은 진시황의 알려지지 않은 전설을 더욱 빛내준다.
내용에 따르면 온갖 종류의 금붙이와 보물을 궤짝에 담아 두고 관의 둘레는 구리를 둘러 녹였으며, 엄청난 양의 수은을 이용해 마치 바닷물이 흐르는 것처럼 연출한 지하궁전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고이자 최악의 황제 진시황

진나라의 31대왕 진시황제는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즉위 당시 당시의 나이가 어려 승상이던 여불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섭정 당시 시황제가 성인식을 위해 궁을 비운 사이 여불위의 수하인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고, 어린 황제는 이에 분개해 관련자를 모조리 숙청하고 여불위를 해임하여 기원전 237년에 이르러 직접 친정에 들어갔다.
 
시황제는 또한 중국의 통일과정에서도 잔인하고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뽐낸다. 기원전 230년부터 황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작전 수립에 몰두 했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한나라를 비롯해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때 인접국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을 시켜 황제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위나라, 진나라 다음으로 가장 강력했던 초나라와 함께 연나라, 제나라까지 연이어 멸망시켜 황제의 나이 39세에 광활한 중국영토를 손아귀에 넣고 만다. 

한편 이러한 찬사 받을 성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흉포성은 극에 달해 대제국 통치를 위한 치세가 아닌 서슬 퍼런 공포 정치를 택한다. 그 일례로 진나라 박사 순우월이 군현제가 아닌 봉건제를 주장하자 시황제는 진나라의 역사, 의술, 농경에 관한 책을 불태우라는 명을 내린 희대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가 있다. 이때부터 세인들에게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게되었다. 또한, 시황제는 왕권과 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능묘 건축, 만리장성 등에 대토목공사를 벌였다.
 
이와 함께 초호화궁전 아방궁을 쌓도록 해 국고를 탕진하는 등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다. 막대한 권력욕에 취한 황제는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명을 내려 대신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지방 순행 중 병고로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생전 황제가 누린 부귀영화는 덧없는 일장춘몽으로 끝났지만, 능묘의 군대 병마용과 함께 여전히 사후세계를 호령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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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2/15 [15:14]  최종편집: ⓒ sangjo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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