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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기 작가의 사진이 있는 이야기] 서울 이태원에 유관순 길과 추모비가 있는 까닭은
 
한남기 둥국대학교 평교원 교수   기사입력  2020/06/05 [18:58]


이태원의 이름에는 이태원의 역사가 숨어 있다. ‘이태원(梨泰院)’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효종 때 이 지역에 배 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유래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태원은 조선시대 서울을 드나드는 여행자를 위한 숙소인 4대 역원(驛院)중의 하나여서 원()이 붙었다. 한양의 4대 역원은 동쪽의 보제원과 절관원 서쪽의 홍제원 남쪽의 이태원 이다. 원래 이태원 역원의 위치는 오늘날의 이태원 거리와는 전혀 다른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이태원의 또 다른 유래는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과 임진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 그리고 그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해서 다를 ()’, 태반 ()’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한 이태원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 곳에 귀화하여 살았는데 그들을 이타인(異他人)이라 불렀다. 그래서 이태원이란 지명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유관순 열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태원에 왜 유관순길이 있고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있는 것일까. 유관순 길은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자 그녀가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천안이나 유관순 열사의 모교인 덕수궁 뒤편 이화학당(이화여고) 앞이 유관순 길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그렇지만 이태원 유관순 길에는 유관순 열사의 한 맺힌 사연이 담겨있다. 유관순은 1902315일 천안 병천에서 태어났다.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당에 입학했으나 1916년 미국인 여성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고등학교) 1학년 이던 1919년에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화학당은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만세운동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3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을 함께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것이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양력 41, 음력 31)이다. 이때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던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문소로 끌려간다.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끔찍한 고문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칠 굳은 각오로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일제는 유관순 열사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끊고자 손톱과 발톱을 뽑는 것도 모자라 잔혹한 성고문까지 하며 추악한 만행을 멈추지 않았다. 연일 계속되는 고문 속에 유관순 열사는 출옥을 불과 이틀 앞두고 결국 1920928일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이 글은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유관순 열사의 유언이다. 유관순 열사가 옥사하자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열사의 시신 인도를 요구 하였고,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 유관순 열사 초혼묘     © 상조매거진


192010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서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 저하가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0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 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 일대를 군용기지와 택지로 개발하면서 이곳의 묘지 이장을 추진하여 1935년부터 193648일까지 이태원 공동묘지의 무연고 28000여 기가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유관순의 묘는 유연고 묘에 포함되지 않아 망우리의 무연고 합장묘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연유로 충남 천안시는 19891012일 유관순 열사의 고향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한 바 있다. 초혼묘는 돌아가신 분의 사체가 발견되지 않거나 매장 장소를 알 수 없는 경우 혼을 불러 묘를 쓰는 경우를 말한다. 과거 이태원 공동묘지는 한강 인근 이태원동, 한남동 일대로 추정된다.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가 이태원에 건립된 것은 바로 이 일대에 당시 시신이 안장됐었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청은 숨어있는 근 현대 역사를 찾는 사업의 일환으로 광복 70주년 맞아 지난 2015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이태원 유관순길 부군당 역사공원 내에 건립하였다. 죽어서 마저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유관순 열사의 한 맺힌 넋이 이제 이곳에서 지친 나래를 접고 영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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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05 [18:58]  최종편집: ⓒ sangjo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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