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을 꿈꾸는 천재 대학생 라이토는 추악한 연쇄살인마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거나 형편없이 낮은 형량을 받는 모습들을 보며 법의 한계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데스노트를 줍게 된 그는 노트에 적힌 반신반의하며 뉴스에 등장한 유괴범의 이름을 적는다. 그런데 실제로 유괴범이 죽음을 맞게 되자 라이토는 데스노트의 힘을 깨닫고,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키라’라는 이름으로 범죄자들을 처단하기 시작한다.

세계 각지의 범죄자들이 의문의 심장마비로 죽어나가자 인터폴에서는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한 명의 천재를 일본 경찰청에 보내는데, 바로 전 세계의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해결해 온 수수께끼의 명탐정 L이다. 곱은 등, 창백한 얼굴에 단 것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 특이한 남자는 함정을 파 키라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며 포위망을 좁혀가고, 이렇게 각자 다른 정의의 이름을 건 두 천재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시작된다.

2006년 개봉한 일본 영화 ‘데스노트’의 줄거리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치밀한 설정과 전개를 바탕으로 두 천재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그리며 숱한 마니아들을 낳았다. 일본 ‘주간 소년 점프’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총 108화 연재된 원작 만화는 라이토와 L의 대결을 그린 1부, L을 이긴 라이토가 N을 비롯한 새로운 미국 수사관들과 새로운 싸움을 하게 되는 2부로 나뉜다. 영화는 원작과는 달리 L이 승리하는 내용으로 각색되었으며, 연결되는 스토리로 두 달 간격으로 개봉됐다.

당연함의 배신이 주는 충격, 그 뒤를 잇는 치밀한 구성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 지난 칼럼에 언급된 바 있는 ‘허리케인 죠’ 등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린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들은 대체로 졸작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데스노트는 적절한 각색으로 만화 못지않은 완성도와 재미를 갖췄다.

이름을 적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노트를 전면에 내세운 기본적인 설정만 보면 과연 이 절대 무기를 가진 자와 싸움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무런 물리적 위해를 가하지 않고, 가까이 있을 필요도 없으며,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대상을 죽일 수 있는 절대 무기가 있는데 어떻게 그 사용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설사 사용자를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가 내 이름을 노트에 적는 순간 나는 죽음을 맞게 되는데 어떻게 그에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L은 전 세계 동시 방송으로 한 남자를 수사관으로 내세워 키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이를 본 라이토는 망설임 없이 방송에 등장한 남자의 이름을 노트에 적는다. 실제로 남자는 그 즉시 죽고 말지만, 사실 그는 처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사형수였으며 이 방송이 전 세계 동시 생방송이라는 설명 또한 거짓이었다. 그 시각 방송이 나간 지역은 동경이었으며, L은 세계 곳곳에 순차적으로 방송을 하고 키라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를 단서로 키라가 거주하는 지역을 특정한 L은 계속해서 정보를 파악하며 라이토에 근접해간다. 절대 무기를 가진 키라가 한 천재에 의해 정체가 발각될 위기에 놓이며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순식간에 균형을 맞추게 되고, 관객들은 당연하게 여겨졌던 사실에 배신당하며 짜릿한 충격을 받게 된다. 또 초반의 이 강력한 한방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 뒤에는 키라에게 근접해가는 L의 천재적인 추리가 이어지며 관객들을 더욱 즐겁게 한다.

여기에 반격하며 수사망을 회피하는 라이토의 전략 또한 기발하다. 서슴지 않고 자신의 주변 인물을 희생시키며 수사망을 교란하고, 데스노트의 규칙을 모르는 수사관들을 상대로 교묘하게 트릭을 쓰며 논리적으로 L을 압박한다. L은 라이토가 키라라는 심증을 갖고 있지만, 세계 최고의 천재로 설정된 두 남자의 싸움에서 심증이나 기싸움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로지 논리와 추리, 기발한 트릭만이 이들의 팽팽한 대결을 이어간다.

확실한 세계관이 만든 판타지 추리물

이 영화에는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수많은 트릭과 이 트릭의 본질을 파헤치는 끝없는 추리가 등장한다. 일반적인 추리물은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 상황을 촘촘히 구성하고, 해결사가 그 단서들을 하나씩 찾아 범인과 범행 수법을 알아낸다. 즉, 이미 과거에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며, 추리하는 자와 회피하는 자가 계속해서 트릭을 만든다. 추리해야할 대상과 사건이 실시간으로 계속 등장하는 방식이다. 한정된 러닝타임을 갖고 있는 영화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칫하면 추리가 필요한 특정 설정이 자세히 설명되지 못하면서 김이 빠지거나, 수많은 설정들이 충돌하며 길을 잃고 오류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깔끔하게 각각의 트릭과 추리를 마무리하며 이야기를 정점으로 끌고 간다. 이는 데스노트라는 가상의 물건에 대한 확실한 규칙과 세계관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데스노트는 첫 장에 이 노트의 규칙이 적혀 있다. 노트에 이름이 적힌 자는 죽지만, 이름을 적은 인물의 얼굴을 알고 있어야 하며, 이름 다음에 40초 이내에 사인을 적으면 그대로 실현되고 사인을 적지 않으면 모두 심장마비로 죽는다. 또 사인을 적으면 죽을 때의 자세한 상황을 기재할 6분4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러한 내용들은 분명 차후에 전개될 스토리를 위해 마련된 장치들이지만, 실제 데스노트가 오류 없이 실행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하는 내용들이기도 하다. 애초에 무리한 설정은 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본래 데스노트는 사신(死神)이 소유한 도구이지만, 단지 심심해서라는 이유로 인간계에 던져준 것이다. 본래 데스노트는 이런 규칙들이 적혀있지 않았지만, 사신이 인간계로 노트를 던지면서 규칙을 적어 넣었다. 사람들에게 데스노트를 쥐어준 것은 사신에게 하나의 놀이일 뿐이며, 놀이를 위해서는 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노트에 왜 규칙이 적혀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까지 세밀하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판타지와 추리물 모두 쉽지 않은 장르다. 판타지 속 세계는 지구의 물리적 법칙들이 무시되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의 판타지적 행위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세계 나름대로의 규칙과 세계관이 존재해야한다. 추리물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신선함과 섬세한 장치를 두면서도 억지스럽지는 않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데스노트는 이처럼 확고한 전제와 치밀한 전개가 필요한 두 장르를 혼합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구성을 이끌어냈다. 데스노트라는 유치해 보이는 설정이 아직까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이유다.